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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➌ 정조의 정치
                                             정리   •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인재를 고르게 등용함.
                                                  • 규장각을 설치함. → 젊고 능력 있는 학자들이 나랏일과 관련한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함.
                                          정조의 개혁 정치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인재를  고르게  뽑았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젊고 능력 있는 학자들이 나랏일과 관련한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업에 대한 규제를 풀어 상인들이 전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규장각(창덕궁 주합루,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  있었으며,  도망간  노비를  찾아내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을
           왕실의 도서관이면서 학문 및 정책을 연
           구하던 곳.                         금지하여 백성의 생활 안정에 힘썼다.
                                             보충 설명  정조
                                           정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 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세손에 책봉되었습니다. 붕당 간 다툼 속에서
                                           사도 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자신의 맏아들 효장 세자의 아들로 신분을 바꾸어 왕통을
           격쟁  왕이  다니는  길목에서
                                           잇게 하였습니다. 정조는 80세가 넘은 영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다가 영조 사후 25세의 나이로
           백성이 징이나 꽹과리를 울려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손 시절에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겪고 신변의 위협을 받으며 성장한 정조는
           억울한 사연을 직접 알리는 제도.
                                           즉위식에서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를 말하였지만, 정치 보복은 최소화하였습니다.
                                                                   정조,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알겠다. 과인이
              수업 제안
            정조 대 격쟁과 관련된 영상 자료를 보면           알아보고 바로잡도록        정조는  백성들의  소리를  직접  듣고  어려움을
            서 격쟁 제도의 특징을 파악하고, 정조의               하겠다.
            애민 정신도 생각해 보게 합니다.                               풀어 주기 위해 격쟁 제도를 활용하였다. 더 많은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행차를 농사일을

                                                             쉬는 계절에 하도록 하였다.























                                                            보충 설명  신문고
                          흑산도에 사는 김이수입니다.                 조선 시대에 민원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격쟁 외에 신문고 제도가 있었습니
                       흑산도는 종이 만드는 데 쓰는 닥나무를              다. 조선 건국 초기인 태종 때 처음 설치된 신문고 제도는 대궐 문루에 달린
                      세금으로 바쳐야 합니다. 섬에는 닥나무가              큰 북을 쳐 자신의 억울함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신문
                        자라지 않는데 어떻게 세금을 낼 수               고가 울리면 의금부 당직청에서 북을 친 자의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였습니
                                                          다. 그러나 신문고는 서울 지역의 양반이 주로 이용하여 특정 신분, 특정 지
                        있습니까? 이 세금을 없애 주십시오.
                                                          역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절차에도 각종 통제가 가해져 크게 활성화되지는
                                -『일성록』 -
                                                          못하였습니다. 15세기 후반에 신문고를 대신하여 격쟁이 등장하였습니다.

           90        사회의 새로운 변화와 오늘날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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