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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1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일본
6 차시
에 다섯 번이나 사신을 파견하였다.
대조영
이러한 선왕의 적극적인 중흥 노력에 힘입어 발해는
대조영은 발해의 제1대 국왕으로 698년부터 719년까 9세기 말까지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 시기에 당은 발해
지 재위하였으며, 사망한 후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다. 를 가리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발해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책의 열전에 적혀 있는 몇 - 문화콘텐츠닷컴(www.culturecontent.com) -
장이 전부이고, 대조영에 대한 기록은 한 줄에 불과하
다. 그나마 적혀 있는 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내용도 역 7 8
사책마다 다르다. ~ 차시
『구당서』에서는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사신도
별종이다.”라고 하였고,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원래
속말 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은 자로 성은 대씨이다.”라고
하였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대조영을 원래는 속말 말
갈이고,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말갈적
요소와 고구려적 요소를 동시에 언급하였다. ▲ 청룡(동쪽) ▲ 백호(서쪽)
반면 한국의 역사책인 『삼국유사』에는 『삼국사』와 『신
라고기』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옛 장군 조영의 성은 대
씨인데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나라를 세워 발해라고 하
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조영의 종족적 출신에 대
해서는 정확히 언급하지 않은 채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 ▲ 주작(남쪽) ▲ 현무(북쪽)
라고 하고, 발해를 세운 주체가 고구려의 유민이었음을 사신은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
밝혔다. 의 현무를 말한다. 동서남북에서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제왕운기』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만 사신의 개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후한 대에 이르러
언급하였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발해는 속 사신은 방위신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후 회화나 공예
말 말갈인데 고구려인 대조영이 발해를 세웠다.”라고 하 의 주제로 많이 표현되었다.
여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규정하고 고구려적 요소를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사신도가 그려
강조하였다. 지면서 사신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4~5세
- 우리역사넷(www.contents.history.go.kr) - 기에 그려진 고분 벽화에는 주로 일상생활과 관련된 풍
속도가 많지만, 6세기 이후에 그려진 고분 벽화에는 사
해동성국 신이 중요한 그림의 제재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사신
9세기에 발해의 중흥을 이룬 선왕은 즉위 초에 당에 은 단순한 방위신의 성격에서 벗어나 무덤을 지키는 수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을 받았으며, 매년 당에 사신을 파 호신, 나아가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견하여 당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위상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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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선왕의 적극적인 대당 외교는 발해가 대외적
으로 팽창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에
발해는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북쪽의 여러 말갈을 무령왕릉
차례로 복속하여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또 신라에 대한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한 최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발해 초의 왕릉이라는 점에서 고고학적·역사적 가치가 있다.
의 최대 영역이 이 무렵에 완성되었다. 선왕은 일본과의 백제 고분이 대부분 도굴의 피해를 입었으나,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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