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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가 전해지지 않지만, 대체로 근초고왕(재위 346~375) 그러나 불교는 모든 생명이 각자가 살면서 쌓은 업에
대를 전후한 시기에 율령을 제정·반포하였을 것으로 추 따라 윤회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업에 따른 인
정한다. 고구려는 율령 반포 이후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연으로 나타나는 응보라고 가르쳤다.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대에 영토를 크게 넓히고 전성기 삼국은 국왕 주도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고구려는 소
를 누렸다. 백제와 신라 역시 율령 반포 이후 각각 근초 수림왕 2년(372년)에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
고왕과 진흥왕 시기에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여 국 였고, 이어 백제가 침류왕 즉위년(384년)에 받아들였다.
력을 내외에 떨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라가 법흥왕 14년(527년)에 불교
- 우리역사넷(www.contents.history.go.kr) - 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것은 삼국이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절을 세
광개토 대왕과 광개토 대왕릉비
운 때를 말하는 것이고, 삼국에 불교가 들어와 퍼진 것
군사 전략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고구려의 광개토 대 은 이보다 훨씬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왕은 즉위하면서 곧바로 정복 활동에 나섰다. 그 첫 상 - 서의식,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 - 고조선·삼국』,
대가 백제였다. 광개토 대왕은 즉위 초부터 백제에 대해 가람기획, 2013, 367쪽 -
적극적인 공세를 폈는데, 396년에 백제의 58성 700촌을
공격하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여 아신왕의 항복 진흥왕 순수비
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광개토 대왕의 업적은 광
신라 진흥왕은 재위 기간 동안에 낙동강 서쪽의 가야
개토 대왕릉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
광개토 대왕릉비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전개된 광개토
하여 서해안 지역에서 중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였
대왕의 정복 활동을 자랑스럽게
으며, 동북쪽으로 함경남도 지방까지 점령하였다. 이처
기록한 장중한 규모의 석비이다.
럼 확대된 영역을 진흥왕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
살피고 국가에 충성과 절의를 바친 사람의 공로에 대한
해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포상을 선포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
이 석비는 당시 고구려의 국력에
하기 위해 세운 비석을 순수비라고 한다. 지금까지 발견
걸맞게 높이 6.39m의 거대한 규
된 진흥왕 순수비는 총 4개이며, 이들을 약칭하여 창녕
모로 만들어졌다. 비의 네 면에는
비·북한산비·마운령비·황초령비라고도 한다.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한 글자
진흥왕의 4개 순수비는 단양 신라 적성비와 함께 진흥
의 크기는 무려 12㎝에 이른다.
왕 대 주요 인물들의 동향, 인명 표기와 관등제를 비롯
웅장하고 뛰어난 예서체 글씨는
하여 6부의 운영 실태를 밝히는 주요 자료로서 그 가치
당시 고구려의 문화가 얼마나 수
▲ 광개토 대왕릉비 가 매우 높다.
준이 높았는지 보여 준다. (중국 지린성)
- 강종훈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1』,
웅진지식하우스, 2015, 159쪽 -
삼국의 불교 수용
삼국의 불교 수용은 귀족과 일반 백성의 가치관 및 세
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
은 자연의 변화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일도 천신이 주
▲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 ▲ 단양 신라 적성비(충청북도 단양군)
재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은 사람의 혼령과 맺힌 한 수비(국립중앙박물관)
이 인간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encykorea.aks.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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