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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당의 전쟁(나당 전쟁)
                  5 차시                                                                                             1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
                    김춘추                                                                                            단원
                                                                  였지만 승전의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다. 반면 당은 옛 백
                   김춘추는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로, 진
                                                                  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옛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
                 평왕과 선덕 여왕의 보호를 받으며 명망을 쌓았다. 그는
                                                                  치하여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멸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부부의 연을 맺어 김유신과
                                                                  망 후인 669년부터 본격적으로 당과의 대결을 준비하였
                 가족 관계를 형성하였다.
                                                                  고, 마침내 670년 3월에 오골성을 선제공격하여 전쟁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 위협 속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은
                                                                  시작되었다.
                 진덕 여왕을 앞세워 친당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를 바
                                                                    신라는 670년 7월부터 웅진도독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
                 탕으로 국왕의 권위를 높여 진골 귀족을 제압하려고 하였
                                                                  격을 펼쳐 백제 옛 땅을 대부분 점령하였다. 나당 전쟁의
                 다. 645년에 진덕 여왕의 서거로 성골 신분이 단절되었
                                                                  분수령은 675년에 발생한 매소성 전투였으며, 이 전투
                 다. 진덕 여왕에게는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다음 왕은 진
                                                                  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전세가 신라로 기울었다. 이후
                 골 귀족 중에서 찾아야 했다. 진골 귀족들은 상대등 알천
                                                                  676년에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당에 승리함으로써 당
                 을 추대하였지만, 알천은 이를 고사하고 김춘추를 천거하
                                                                  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였다. 김춘추는 이를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받아들
                                                                    신라는 7년에 걸친 전쟁에서 당을 물리치고 한반도를
                 이는 모양새를 갖추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다수의 진골
                                                                  지켜 냈다. 이러한 나당 전쟁은 당시 국제 정세의 영향
                 귀족은 알천을 추대하여 김춘추와 김유신의 독주를 막으
                                                                  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의 역량과
                 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정국의 주도권은 김춘추와 김
                                                                  주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에게 넘어가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encykorea.aks.ac.kr) -
                 - 강봉룡,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2 - 통일 신라·발해』,
                                         가람기획, 2013, 40쪽, 46쪽 -
                                                                     신라의 삼국 통합 정책
                    고구려의 멸망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확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여세를                  대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9주로
                 몰아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의 전                   재편하여 옛 삼국 땅에 균등하게 세 개씩 주를 두었다.

                 황을 크게 뒤바꾸었다. 예전에 수 양제나 당 태종이 고                   이는 삼국을 아우르는 통일 국가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
                 구려 정벌에 실패한 것은 요동 지역에서 긴 보급로를 지                   한 것이었다. 또한 신문왕은 기존의 중앙군 외에 새롭게
                 켜야 하는 전략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                   고구려인과 백제인, 말갈인 등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만
                 만 백제의 멸망으로 한반도 내에 군사 기지를 갖게 된 당                  들어 중앙 군사 조직인 9서당을 정비하였다.
                 의 군대는 남쪽으로 평양성을 손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한편 신라가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수도 경주는
                 또 신라에서 군량을 공급받아 겨울철에도 군사 작전이                     점점 국토의 동남쪽 끝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이러한 약
                 가능해져 장기전을 할 수 있었다.                               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증왕 때부터 이미 수도 외에 ‘소

                   이처럼 불리한 정세 속에서 666년에 고구려의 집권자                  경’을 설치하여 국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방안이 추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                   진되었다. 신문왕은 기존 3개의 소경 외에 685년에 서원
                 났다. 동생들에게 쫓긴 연남생은 국내성에서 10만 호를                   소경과 남원소경을 설치하여 5소경을 완비하였다. 그리
                 이끌고 당에 투항하였다. 667년 9월에 고구려의 지배층                  고 소경에 신라의 중앙 귀족과 함께 새로 병합한 가야와
                 이 분열한 틈을 타 당의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평                  백제, 고구려의 귀족들을 살게 하여 각 지역의 정치적·
                 양성도 무너지고 말았다(668년).                              문화적 거점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 강종훈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1』,                      - 강종훈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1』,
                                   웅진지식하우스, 2015, 203~204쪽 -                         웅진지식하우스, 2015, 231~23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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