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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참고 자료



                  1 2     차시                                      커졌다. 군영은 각기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군포를
                   ~
                                                                  최대한 거두었는데, 어떤 사람은 2필을 납부하였지만                     2
                    붕당 형성과 붕당 정치의 전개
                                                                  어떤 사람은 그 이상을 내기도 하였다. 게다가 한 집에                   단원
                   선조 대 이후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 세력은 명종의                  군역 대상자가 많으면 그 부담은 매우 커져 도망하는 사
                 왕비 심씨의 오빠인 심의겸의 영향력을 두고 논란이 일                    람들도 생겨났다.
                 어나 서인과 동인으로 분화되는, 붕당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균역청을 설치
                   서인과 동인은 대체로 정계 진출의 선배 집단과 후배                   하여 종래의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하
                 집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서인이 대개 이                  고, 그 부족액을 어업세, 염세, 선박세 등으로 보충하는

                 이와 성혼과 가까운 학문적 동지이고 동인이 주로 이황                    양역 제도 개선책을 실시하였다.
                 과 조식의 제자라는 학문적인 분화도 개입되어 있었다.                                    -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역사용어사전』,
                 또한 동인은 당시 심의겸으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을 완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5, 283~284쪽 -
                 전히 정계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고, 서
                 인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입장이었다.                          정조
                    16세기 중반 이후 결성된 조선 성리학의 각 학파는 성                  정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 세자의 아들로 태어
                 리학에 대한 이념적인 모색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의                    나 세손에 책봉되었다. 붕당 간 다툼 속에서 사도 세자
                 현실에 참여하면서 정파로 변하였다. 선조 대 이후 학맥                   가 죽은 뒤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자신의 맏아들 효장 세
                 이나 학파에 기반을 둔 분파가 붕당으로 결집되면서 공                    자의 아들로 신분을 바꾸어 왕통을 잇게 하였다. 정조는

                 론에 의거한 정치를 지향하고, 붕당 간에 정권을 차지하                   80세가 넘은 영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다가 영조
                 기 위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치 운영                   사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형태를 붕당 정치라고 부른다.                                   세손 시절에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겪고 신변의 위
                                                                  협을 받으며 성장한 정조는 즉위식에서 “과인은 사도 세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자의 아들이다.”를 처음으로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정치
                                                        소론
                               인조                                 보복은 최소화하였다.
                  서인
                               반정                                   정조는 붕당 대립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져 왕권
                                                        노론
                                     서인과
                                     남인의    예송   환국               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공존
                                                                  계승하였다. 영조가 각 붕당에 고르게 배분하여 관직을
                           남인                                     주는 탕평을 추진하였다면 정조는 붕당과 관계없이 능
                  동인                                              력을 중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한 세손 시절부터
                           북인    집권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의 문화에 관
                                 - 권내현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3』,      심을 갖고 서적을 들여와 학문 연마에 힘썼는데, 즉위하
                                    웅진지식하우스, 2016, 122~123쪽 -
                                                                  자 곧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encykorea.aks.ac.kr) -
                    균역법
                   임진왜란 이후 군역은 본래 직접 군대에 가 병사로 복                     규장각
                 무하는 방식에서 1년에 군포 2필을 내는 경제적 부담으                     정조는 국왕 중심의 탕평 정국을 이끌기 위한 공간으

                 로 바뀌었다. 훈련도감, 어영청 등이 차례로 등장하여                    로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은 설치
                 5군영 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백성의 군역 부담은 더욱                   초기에 국왕의 글과 글씨 보관뿐만 아니라 각종 서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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