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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법의 이점과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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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내기법의 시행으로 첫 번째는 김매기(논밭의 잡초를
                                                                     실학의 사회 개혁론
                 뽑는 일)에 드는 수고를 줄일 수 있었다. 모내기법 이전
                                                                    성리학이라는 전 근대 학문과 별개로 실학이라는 근                    2
                 의 농법인 직파법으로 벼를 키울 경우 4~5번 정도 김매
                                                                  대 학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원
                 기를 해야 하는데, 모내기법에서는 2~3번으로 그쳤다.
                                                                    실학의 이념은 구습에 안주하는 낡은 조선을 혁신하는
                   두 번째는 수확량이 직파법에 비해 증가하였다. 『임원
                                                                  것이었고, 이는 학파와 당파를 불문하고 공유하는 문제
                 경제지』를 저술한 서유구는 두 곳의 지력, 즉 모판과 논
                                                                  의식이었다. 주요 내용은 토지와 농업 개혁론, 상공업 개
                 의 힘을 이용하여 벼를 기를 수 있다는 점과 모내기하는
                                                                  혁론 등을 포함한 국가 개혁론이었다. 이 가운데 영·정조
                 과정에서 좋지 않은 모를 솎아 내고 튼튼한 모를 고를 수
                                                                  대에 일부 실현된 것도 있고 실현될 수 없는 내용도 포함
                 있다는 점을 모내기법의 장점으로 말하였다. 지력을 잘
                                                                  되어 있었다. 신분 제도와 토지 제도 개혁 등은 근대 국
                 활용하고 튼튼한 모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모내기법
                                                                  가 건설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
                 은 수확량의 증대를 가져올 수 있었다.
                                                                  늘날에 대부분 실현되었을 만큼 선구적인 주장들이었다.
                                 - 권내현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3』,
                                    웅진지식하우스, 2016, 226~228쪽 -             - 박평식 외,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5 –
                                                                                      조선 후기』, 가람기획, 2015, 359쪽 -

                    상품 작물, 담배와 고추
                                                                     세도 정치와 백성의 고통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담배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몇몇 왕실의 외
                 는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되며,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
                                                                  척 가문이 모든 정치권력을 쥐고 흔들었는데, 이 시기의
                 도 이 무렵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치 형태를 세도 정치라고 한다.
                   초기에는 담배가 약초로 인식되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세도 정권은 주요 관직을 모조리 차지하고 지방 선비
                 지남에 따라 약초보다 기호품으로 애용되었고, 손님을
                                                                  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냈을 뿐 아니라, 지방 사회에
                 대접할 때 차나 술 대신 담배를 권하는 풍습도 생겼다.
                                                                  서 성장하던 부농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왕권을 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증가하자 그것을 심는 사람도
                                                                  행하는 지방 수령의 자리를 상품화하여 팔았다. 또한 이
                 많아졌다. 처음에 농민들은 자신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시기에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지배층의 사치
                 텃밭에서 재배하는 정도였는데, 점차 피우는 사람이 많
                                                                  욕구도 더욱 높아져 국가의 재정 지출이 늘어났다. 국가
                 아지고 담배를 찾는 사람도 많아지자, 곡물을 재배하는
                                                                  재정은 만성적인 위기에 놓였고, 세도 정권은 민중을 수
                 밭이나 심지어 비옥한 밭에까지 담배를 재배하였다. 농
                                                                  탈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민들은 상업 작물로 담배를 재배하여 수확하고 그 수확
                                                                    당시 세금 제도는 전세, 군포, 환곡의 삼정으로 이루
                 물을 내다 팔아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어졌지만, 명목이 없는 부세도 많았다. 토지에 부과한
                   고추가 전래되기 전에는 고깃국이나 김치에 후추를 넣
                                                                  전세는 원래 1결당 20두 정도였으나, 실제로는 여러 명
                 어 매운맛을 내고 냄새를 제거하였다. 그런데 고추가 전
                                                                  목을 붙여 1결당 100두 정도를 거두어 갔다. 그리고 세
                 래됨과 동시에 후추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17세기에 고
                                                                  금으로 내야 할 쌀이나 면포를 화폐로 계산하여 징수하
                 추는 가루로 만들어져 김치에 쓰였고, 점차 조선에서 향
                                                                  면서 수령과 서리들이 부정을 저질러 농민의 고통이 더
                 신료로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추가 김
                                                                  욱 심해졌다. 군포는 균역법 시행 이후 1필을 징수하였
                 치에 빼놓을 수 없는 양념이 되고 고추를 주원료로 한 고
                                                                  지만,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군역이 면제되는 양반 수가
                 추장을 담그게 되자, 주요 생산물로서 고추가 널리 재배
                                                                  늘어 군포 수입이 줄게 되자, 정부는 군현 단위로 일정
                 되었다.
                                                                  한 군포액을 부과하여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
                                 - 권내현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3』,
                                    웅진지식하우스, 2016, 170~171쪽 -     때문에 총액을 채우기 위해 갓난아이에서 죽은 사람, 노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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