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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에게까지 군포가 부과되었고, 부담을 이기지 못해 도                     람은 모두 4명으로, 선조의 생부 덕흥 대원군, 인조의 생
           망치면 이웃과 친척에게 그 부담을 떠넘겼다. 환곡은 애                    부 정원 대원군, 철종의 생부 전계 대원군 그리고 고종
           초 빈민 구제책으로 봄에 곡식이 떨어졌을 때 국가의 곡                    의 생부 흥선 대원군이다. 흥선 대원군을 제외한 3인은
           식을 농민에게 대여하였다가 가을에 10% 이자를 붙여                     그들이 죽은 뒤 추존되었고, 흥선 대원군만 고종이 즉위

           받는 제도였다. 그런데 정부의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하면서 대원군으로 봉해졌다. 일반적으로 ‘대원군’이라
           세금으로 바뀌면서 이 틈을 타 관리와 향리들이 무자비                     고 부르는 인물은 흥선 대원군을 가리킨다.
           하게 조세를 거두어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바빴다. 받지                     철종 대 안동 김씨가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
           않으려는 사람에게까지 곡식을 강제로 빌려주는가 하                       협을 가하였다. 이 때문에 이하응은 호신책으로 무뢰배와
           면, 나누어 줄 때는 적게 주고 돌려받을 때는 많이 거두                   어울리며 파락호 생활을 하였다. 또한 안동 김씨 가문을
           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백성을 수탈하였다.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 권내현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3』,       사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서민 생
                              웅진지식하우스, 2016, 281~283쪽 -      활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차후 국정을 장악하였을 때 백성
                                                             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4 차시
                                                              파락호 생활로 감추고 있었지만 이하응은 난세의 뛰
              문자도                                            어난 정략가로 장차 국정을 운영할 식견을 갖추었고, 왕
             문자도는 그림 글씨, 꽃 글씨라고도 불린다. 문자도는                   실의 최고 어른인 조 대비(익종의 비)와 연줄을 맺고 있
           충(忠), 효(孝), 제(悌), 예(禮) 등 유교적 교훈의 내용을              었다. 그리고 조 대비와 장차 후계자 없이 승하할 철종
           가진 것과 수(壽), 복(福), 부(富), 귀(龜), 성(星) 등 장수           의 왕위 계승자로 자신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지명하기

           와 행복, 기복 신앙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눌 수                    로 묵계를 맺었다.
           있다. 특히 전자는 효제도라고도 불리며 유교적 도덕 규                     1863년 12월 초에 철종이 사망하자, 조 대비는 이하
           범을 일반 서민에게 보급하고 지키게 하는 데 중요한 역                    응의 아들을 익성군으로 봉하여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
           할을 하였다.                                           게 하였다. 12세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군은
                                                             ‘대원군’의 칭호를 받았다.
              조선 후기 회화 발달의 배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encykorea.aks.ac.kr) -
             조선 후기에는 풍속화를 비롯한 진경산수화 등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라고 일컫는 작품들이 나왔다. 이 시기                       운요호 사건
           에는 그러한 회화사적인 부흥이 가능한 시대적인 상황
                                                              1875년 9월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 외 1척이 인천 앞
           과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18세기 이후 영·정조 대
                                                             바다에 나타났다. 이들은 강화도 동남쪽의 난지도 앞바
           에 이루어진 정치·경제적 안정과 실용을 지향한 실학의
                                                             다에 닻을 내리고 수십 명의 해병이 식수 보급을 명목으
           대두, 서서히 싹튼 서민 의식의 성장을 그 배경으로 꼽
                                                             로 보트에 나누어 타고 해로를 탐측하면서 강화도의 초
           는다.
                                                             지진에 접근하였다. 이곳을 경비하던 조선의 수비병이
                         - 윤진영, 『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수차례 경고하였지만 이들이 듣지 않자 포격을 가하였
                                      다섯수레, 2015, 8~9쪽 -
                                                             다. 포격을 받은 보트가 군함으로 철수한 뒤 일본군이 군

            5 차시                                             함을 움직여 초지진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함대는 방향을 돌려 영종도에 병력을 상
              흥선 대원군
                                                             륙시켜 살육·약탈·방화를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대원군’은 조선 시대에 왕이 형제나 자손 등 후사가 없                  이 사건은 근대 제국주의적 영토 팽창주의 정책을 추
           이 죽고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국왕의 생                    구하던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발단이 되었다.

           부에게 주던 존호이다. 조선 시대에 대원군에 봉해진 사                                     -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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