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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하고 편찬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왕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쌓은 성곽, 수원 화성
실 도서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무엇보다 국왕의 동
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기록한 『일성록』을 편찬
하는 일을 주관함으로써 중요한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
게 되었다.
정조는 규장각의 업무를 담당하는 관원 선발에 심혈
을 기울여 이들을 통해서 붕당 간 대립을 극복하고, 학
술 진흥과 탕평 정치를 이루어 나가고자 하였다. 신분을
초월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규장각의 실무를 담당하 전통적으로 한국의 성곽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는 검서관에 관직 진출이 막혀 있던 서얼을 등용하였다.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으로 기능상 분리하였다. 그
검서관은 국왕 가까이에서 서적을 편찬, 간행, 관리하는 러나 수원 화성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을 따로 두지 않고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규장각의 주관으로 젊은 관리 평상시 거주하는 읍성에다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중에 인재를 선발하고 규장각의 각신이 이들을 재교육 따라 규칙적이거나 대칭의 형태를 취하기보다 땅의 지
하게 하였다. 이 외에도 규장각 관원들은 국왕을 가까이 형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의 정통 양식을 보
에서 보좌하면서 학술과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 여 주지만, 축조에 사용된 건설 장비나 방어 시설 등은
였다. 정조의 특별한 관심 속에 있었던 규장각 관원들은 서양의 것을 응용하였다.
우월적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특혜를 받은 만큼 정해진 군사 지휘소 역할을 하는 서장대를 비롯하여 외부와
규정에 엄격히 따라야 했다. 의 통신 시설인 봉수대, 깃발을 흔들거나 쇠뇌를 쏘는 노
-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 대 등 화성에는 다양한 군사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특
히 속이 비었다는 뜻의 공심돈은 비상시 성곽 주위 적의
조선의 민원 처리 방식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로서 화성에서 처음 등장하였
조선 시대에 민원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신문고, 상언, 다. 이처럼 다양한 군사 및 방어 시설을 갖춘 성곽은 우
격쟁 등이 있었다. 국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 리나라에서 화성이 유일하다.
도로 잘 알려져 있는 신문고는 태종 대에 처음 설치되었 수원 화성은 다른 성에 비해 성벽의 높이가 4m 정도 낮
다. 대궐 문루(門樓)에 신문고라는 큰 북을 달아 두고 억 은데, 여기에도 과학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 임진왜란 등
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북을 치면 그 소리를 국왕이 직 이전의 전쟁에서는 주로 병사들이 성을 타고 넘어 점령
접 들을 수 있게 하였고, 의금부 당직청에서 북을 친 자 하는 방식이었지만, 18세기에는 화포로 성벽을 쏴서 무
의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신문고는 서울 지 너뜨리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즉 화포의 발달로 성벽이
역의 양반이 주로 이용하여 특정 신분, 특정 지역으로 제 높으면 오히려 대포의 표적이 되어 무너지기 쉽다는 점
한되어 있었고, 절차에도 각종 통제가 가해져 크게 활성 을 고려한 설계였다. 성벽의 높이가 낮으면 대포를 맞더
화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따라 15세기 후반 신문고를 대 라도 타격이 그리 크지 않아 성을 사수하는 데 유리하다.
신하여 상언·격쟁이 등장하였다. 화성은 성벽 재료도 기존의 성곽과 차이가 있다. 기존
상언·격쟁은 주로 국왕의 행차길에 어가 행렬을 막고 성의 경우 자연석이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한 데 비해
호소하였는데, 정조 대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상 화성에는 화강암과 함께 벽돌이 많이 사용되었다. 화강
언은 문서로 작성하여 관청에 내는 방식으로 문자 생활 암은 강한 강도를 가졌지만 돌과 돌의 이음새가 딱 들어
에 익숙한 사대부가 선호하였다. 반면 격쟁은 ‘징을 친 맞지 않아 화포 공격에 쉽게 허물어졌다. 반면 벽돌과 석
다’는 뜻으로 문서보다는 말로써 국왕에게 호소하는 방 회로 벽을 쌓고 흙을 채우면 화포의 강한 공격에도 쉽게
식이었다.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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