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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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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1      차시                                   방 호족의 입장에서도 자제를 중앙으로 보내면 다른 호                    단원
                      ~
                                                                  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인정받고 관할 지역에 대한 지배
                    궁예의 폭정
                                                                  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젊은 시절에는 병사들과 생사고락                          - 이병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3 - 고려』,
                 을 같이하고 공정한 처신으로 인심을 얻었지만, 왕이 되                                               가람기획, 2013, 60쪽 -
                 자 의심이 많아졌다. 905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 궁예
                                                                     태조 왕건의 혼인 정책
                 는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칭하며 자신을 신비화하기 시
                                                                    왕건의 부인은 기록된 사람만 29명에 이른다. 왕이 되
                 작하였다. 그는 미륵 관심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
                                                                  기 전의 왕비를 제외하고 왕이 된 이후의 결혼은 모두 정
                 다볼 수 있다고 하면서 부인과 아들마저 죽이고, 부하들
                                                                  략결혼이었다. 왕건은 정략결혼으로 정치적 동맹을 이
                 을 숙청하였다.
                                                                  루고 왕실을 확대할 수 있었다.
                   궁예가 폭정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 후고구려의 수도
                                                                    왕건은 부인이 많은 만큼 자식도 많아 왕자 25명과 공
                 로 삼은 철원은 고립된 분지여서 지방 세력이 성장하기
                                                                  주 9명을 두었다. 그는 이복 남매 사이인 자식들을 서로
                 에는 좋은 곳이지만, 수로가 없고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
                                                                  결혼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는 왕실의 특권이 외부로 빠
                 지로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궁예는 수도의 조건을 갖
                                                                  져나가는 것을 막고 신라의 골품제처럼 핏줄의 순수성
                 춘 송악을 포기하고 철원을 고집하였다. 수도는 사람과
                                                                  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략결혼과 왕실
                 물자가 모이는 곳인데, 불편한 교통 때문에 물가가 오르
                                                                  의 근친혼은 왕건이 죽은 후에 왕위 쟁탈전이 격화되는
                 고 운송 비용이 늘어 세금도 세 배로 증가하였다. 이로
                                                                  결과를 가져왔다.
                 인해 백성의 불만이 높아지자 불안해진 궁예는 더욱 포
                                                                                  - 김인호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악해지고 신비주의에 기울었던 것이다.
                                                                                          웅진지식하우스, 2011, 31쪽 -
                                 - 김인호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웅진지식하우스, 2011, 25쪽 -        광종의 정책

                    왕건의 호족 통합 정책                                    왕건이 죽은 뒤 치열한 왕위 다툼 속에서 왕이 된 광
                                                                  종은 호족을 억누르지 않고서는 왕이 제대로 된 정치를
                   왕건은 호족 세력을 포섭하는 데 힘썼다. 그는 자신을
                                                                  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호족들이 불법적
                 낮추고 호족들을 우대하였으며 호족 딸과의 혼인 정책,
                                                                  으로 소유한 노비를 해방하였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호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를 활용하였다.
                                                                  족 출신이 아니어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또
                   사심관 제도는 호족 출신 중앙의 고위 관리에게 출신
                                                                  한 호족들도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함으로
                 지역에 일정한 권한을 행사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태
                                                                  써 왕에 충성하는 신하로 만들려고 하였다.
                 조 18년(935년)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경순왕)가
                                                                              -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항복해 오자, 왕건이 그를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사심
                                                                                            휴머니스트, 2014, 127쪽 -
                 관으로 임명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왕건이 사심관 제도
                 를 시행한 것은 수도에 있는 세력을 이용하여 호족 세력                      최승로의 「시무 28조」
                 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건국 초기에는 국가의 통치력                      「시무 28조」 가운데 현재 전하는 것은 22조뿐이다. 내용
                 이 지방까지 미칠 수 없었기 때문에 개경에 거주하는 관                   은 국방 관계, 불교 폐단, 사회 문제, 왕실 관계, 중국 관
                 리에게 출신 지역을 관장하게 하여 간접적으로 지방을                     계, 토착 관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불교의 폐단을 지적

                 통제하였다.                                           하고 개선할 것을 주장한 내용이 많으며, 지방관의 파견
                   한편 기인 제도는 지방 호족의 자제를 뽑아 개경에 올                  과 복식 제도의 정비 등 사회 문제와 관련된 것도 많다.
                 라오게 하여 그들을 간접적으로 규제하는 것이었다. 지                              - 박현숙 외, 『모두의 한국사』, 예경, 2019, 42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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