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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고려는 외교적 위기에 부딪혔다. 고려인이
                                                                          몽골의 5차 침입 때 몽골군은 70여 일에 걸쳐 충주성을          1
                 횡포하고 무례한 몽골 사신을 죽인 것일 수도 있지만, 고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성안에 있는 식량이 거의 바닥나
                                                                          자 충주성 방호별감이었던 김윤후는 “누구든 힘을 다 바           단원
                 려와 몽골의 외교적 분쟁을 원하는 금이나 동진의 범행
                                                                   충주성    쳐 싸우는 사람에게는 귀천의 차별 없이 모두 벼슬과 작
                 일 수도 있었다. 그동안 이들은 고려와 몽골 사이를 이                     전투    위를 주겠다.”라고 하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관노비 명부
                 간질하기 위해 고려 영토를 침범할 때에는 몽골인으로                             를 불태우고 노획한 말과 소를 나누어 주었다. 마침내 이
                                                                          들이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적을 공격하여 결국 몽골군을
                 변복하여 몽골의 소행인 것처럼 가장하였고, 몽골 사신
                                                                          물리치고 그들의 남진도 막았다.
                 이 고려에 들어올 때에는 통로를 가로막고 고려인으로
                 변장하여 몽골 사신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 우리역사넷(www.contents.history.go.kr) -
                   이러한 까닭으로 고려는 저고여 피살 사건을 금이 일
                 으킨 것이라고 몽골에 통보하였다. 하지만 몽골은 이 사                      삼별초의 항쟁
                 건을 계기로 고려와 국교를 끊었으며, 후일 이 사건을 구                    1270년 5월에 마지막 무신 집권자인 임유무가 피살되
                 실 삼아 고려에 쳐들어왔다.                                  면서 무신 정권이 완전히 해체되고, 6월에 고려 정부가
                   저고여의 죽음은 몽골 침략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으                    개경 환도를 단행하였다. 이 와중에 원종이 삼별초의 해

                 나, 몽골의 고려 침입은 그들이 아시아 전역을 차지하기                   산령까지 내리자, 삼별초는 배중손과 노영희를 지도자
                 위해 미리 계획한 군사 행동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 볼 수                  로 삼아 강화도에서 봉기하였다. 이들은 왕족인 승화후
                 있다.                                              온을 왕으로 세우고 관료와 그 가족을 인질로 잡아 진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encykorea.aks.ac.kr) -    로 떠났다. 이들이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정한 것은 개
                                                                  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강화도에 비해 몽골군의 침입

                    김윤후의 대몽 항쟁                                    을 방어하는 데 훨씬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진도의 용장산성에 주둔한 삼별초는 몽골과 전쟁을
                   김윤후는 고려와 몽골의 전쟁 때 군대를 이끌었던 승
                                                                  하는 동안 서남해 도서 지방에 구축해 놓은 수군을 흡수
                 려로, 특히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당시 처인성 전투에
                                                                  하여 강력한 수군을 조직하였다. 이를 이용해 완도와 남
                 서 몽골 장수 살리타를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몽
                                                                  해도 등 서남해안의 도서 지방을 점령하여 고려 정부의
                 골의 5차 침입 때 충주성 전투에서도 몽골군을 물리치는
                                                                  조세 수송로를 차단하고, 나주와 김해 등지를 점거하고
                 데 공을 세웠다.
                                                                  제주도까지 확보하여 후방의 안정 지대까지 갖추었다.
                   김윤후는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1258년에 동북면
                                                                    한편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김방경을 대장으로 하
                 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동북면은 이미 몽골군에
                                                                  는 고려군과 몽골군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연합군은
                 게 함락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삼별초의 수군에 고전하였으나 병력과 물량을
                 이후 고려 정부는 그에게 다시 벼슬을 내려 공로를 인정
                                                                  앞세워 진도를 급습하여 승리하였다. 이때 삼별초의 지
                 해 주었다.
                                                                  휘부는 혼란에 빠졌으며 배중손과 승화후 온도 희생되
                        몽골의 2차 침입 당시 처인 부곡 주민은 처인성에 들어가
                                                                  었다. 삼별초의 생존자들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
                        있었다. 처인성은 지금의 용인 지역이다. 이때 승려로서
                        백현원에 있던 김윤후도 처인성으로 피란하였는데, 몽골             로 탈출하였지만, 1273년에 마지막 근거지인 항파두리
                        군이 공격해 오자 활을 쏘아 몽골 장수 살리타를 제거하            성이 함락되면서 진압되었다.
                        였다. 이에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
                                                                                  - 김인호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처인성  하였다.
                                                                                     웅진지식하우스, 2011, 206~208쪽 -
                   전투   김윤후와 처인 부곡 주민이 살리타를 죽인 것은 사실이
                        지만, 김윤후가 직접 화살을 쏘아 그를 죽였는지는 분명
                        하지 않다. 이는 이후 고종이 그의 공을 포상하여 상장군
                                                                     팔만대장경판 제작
                        에 임명하자, 김윤후가 “전투할 때 저는 활이나 화살을 갖
                        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귀한 상만 받겠습니까.”라고 하며             팔만대장경은 몽골군 침입 당시의 집권자 최우가 주도
                        사양하였다고 한 점에서 파악된다.                        하여 만든 것으로, 조판을 시작한 지 16년 만에 완성되었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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