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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풍                                              『직지심체요절』
                   고려와 원의 사람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각자의 풍속을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시대의 승려 경한(백운은 그의
                                                                                                                   단원
                 따라 하게 되었다. 머리 모양이나 옷, 음식, 언어 등이 섞                호)이 상·하 2권으로 지은 책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면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고려의 상류층은 거의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몽골 복식을 따랐고, 원의 공주가 고려 왕비가 되면서 궁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간행하였다. 그
                 중 복식에도 자연스럽게 몽골풍이 흘러들었다.                         런데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국
                   처음에 고려 사람들은 몽골식 머리를 매우 낯설어했                    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다. 충렬왕의 명령으로 재상에서 하급 관리까지 몽골식                      1886년에 조선은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
                 머리로 깎았는데, 유일하게 머리를 깎지 않은 사람들은                    외교관으로 조선에 온 꼴랭 드 쁠랑시는 조선에 있는 동안

                 대궐 안에서 공부하는 학관이었다. 그러자 왕의 비서 격                   각종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그가 프랑스로 돌아갈 때 『직
                 인 박항이 담당 관리를 설득하여 학생들의 머리를 깎게                    지심체요절』을 가지고 갔고, 1950년경에  『직지심체요절』
                 하였다.                                             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된 것으로 전해진다.
                   음식에도 몽골풍이 들어왔다. 이때 전래된 소주는 현                      그러다 1970년대에 프랑스 유학생인 박병선 박사가
                 재와 같은 희석식이 아닌 증류식 술이었다. 언어에서도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국립도서관에서
                 몽골풍이 나타났다. 왕의 밥상을 가리키는 ‘수라’, 궁궐                  사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서고의 한구석에서 먼
                 에서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마마’, 궁녀를 가리키는 ‘무                 지를 뒤집어쓴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오

                 수리’, 벼슬아치나 장사치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치’ 등                  랫동안 연구한 끝에 이 책이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보
                 도 몽골어에 뿌리를 둔 것이다.                                다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이라는 사실
                                 - 김인호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을 밝혀냈다. 『직지심체요절』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
                                    웅진지식하우스, 2011, 231~232쪽 -     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5   차시                                                       - 우리역사넷(www.contents.history.go.kr) -


                    금속 활자의 발달 배경
                                                                     고려청자의 발전 과정
                   고려에서 금속 활자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2〜13세
                 기이다.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                    고려청자는  초기에

                 지 기술적 전제가 필요하였는데, 당시 고려에서는 이 전                   차를 마시기 위한 청자
                 제가 충족되어 있었다.                                     해무리굽 완이 많이 제
                   첫째, 질기고 깨끗한 얇은 종이가 있어야 했다. 고려                  작되었다. 12세기부터
                 는 양질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 수준에 도달해 있                  자기 제작 기술이 급속         ▲ 청자 소문 해무리굽 완(국립민속박
                 었다. 둘째, 인쇄에 적당한 먹을 갖추고 있어야 했는데,                  히 발전하였고, 그 무         물관)
                 고려의 먹은 유성 먹으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었다. 셋                    렵 고려인들이 스스로 ‘비색’이라고 칭할 만큼 청자의 빛
                 째, 활자를 주조할 수 있는 기술도 필요하였다. 고려에                   깔이 아름다워졌다. 이후 일상생활 용기를 비롯하여 향

                 서는 청동이 다량으로 생산되었으며, 그것을 가공하는                     로, 제기, 기와 등 여러 형태의 청자가 만들어졌으며, 다
                 금속 세공 기술과 청동 주조 기술이 축적되어 있었다. 넷                  양한 종류의 장식 기법이 완성되었다. 동물이나 식물의
                 째, 활자를 판에 고정하는 점착성 물질의 개발도 중요하                   모습을 본뜬 청자도 만들어졌다.
                 였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서적을 필요로 하는 독서 계층                     그러나 고려 후기에 자기 제작 여건이 점차 어려워짐
                 이 있었던 것도 인쇄 기술이 발달하는 배경이 되었다.                    에 따라 대부분 문양이 없는 청자가 생산되었으며, 바탕
                       - 이병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3 - 고려』,       흙이나 유약의 품질이 떨어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가람기획, 2013, 500쪽 -                    - 고려청자박물관(www.celadon.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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