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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차시 날씨를 이용한 귀주 대첩
거란의 1차 침입과 외교 담판 2월에 거란의 병사가 귀주를 지나자 강감찬 등이 동
거란은 송과 전쟁하기 전에 고려를 제압하여 자신의 교(東郊)에서 맞아 싸우는데 양쪽의 군대가 서로 비슷
하여 승패가 결정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종현이 군
편으로 만들고자 고려에 쳐들어왔다(993년). 거란군의
사를 끌고 달려오자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와
주력군은 기병이었다. 기병은 넓은 평지에서 하는 전투
서 군대의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아군이 기세를 타
에는 유리하지만, 산악 지형에서 하는 전투에서는 매우
고 격렬하게 공격하니 거란병이 패하여 달아났다. 아
불리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은 안융진 전투에
군이 추격하여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니 시신이 들
서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자, 전략을 바꾸어 싸우지
을 덮고 …… 살아서 돌아간 사람이 겨우 수천 명이니
않고 고려를 항복시키는 방법을 택하였다. 거란이 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거란이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화 - 『고려사』 -
친론자와 주전론자로 나뉘었다. 화친론자는 서경 이북
의 땅을 거란에 떼어 주고 항복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때 고려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거란군은 귀주에서
서희가 나서서 일단 거란을 만나 그들의 의도를 파악한 강감찬의 고려군과 마주쳤다. 처음에 양 진영은 팽팽하
후에 싸우거나 항복하자고 제안하였다. 게 맞섰다. 그런데 고려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갑자기 비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에 나섰다. 소손녕은 고려가 신 가 쏟아지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강한 비바람이
라 땅에서 일어났는데 고구려 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또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한 것이다. 남쪽에서 공격
한 인접한 거란이 아니라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고 하던 고려군은 백만 명의 지원군을 얻은 듯 기세가 올랐
지적하고 땅을 떼어서 거란에 바치고 국교를 연다면 무 다. 고려군이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이었지만, 비바람을
사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고려는 고 정면으로 마주한 거란군이 쏘는 화살은 제대로 날지도
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며 거란의 동경도 우리 영역 안에 못하였다.
있는 셈이니 침식하였다고 할 수 없으며, 압록강 연안을 고려군이 공격을 시작할 무렵 바람이 갑자기 변하면
여진족이 막고 있어 거란과 왕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 서 동시에 비가 내렸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기압골에
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고려와 거란은 국교를 맺고 강 서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온난 전선에서는 바람이 변하
동 6주를 고려 영토에 편입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고려 지 않아도 비가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랭
는 상당한 실리를 얻었다. 전선이 빠르게 이동하는 경우, 즉 활강형 한랭 전선이 형
- 이병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3 - 고려』, 성되면 귀주 대첩에서 나타난 기상 현상이 발생한다. 활
가람기획, 2013, 569~570쪽 - 강형 한랭 전선 전방에 수직적인 구름이 발생하면서 바
람이 급변하고 비가 동시에 내리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강감찬은 천문과 지리에 밝았으며 평
강동 6주
생 동안 천문 지리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는 날씨를 예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고려에 넘긴 거란은
측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 결정이 엄청난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고려를 침략할
- 『사이언스타임즈』, 2010. 9. 1. -
때 강동 6주가 가장 통과하기 힘든 요새 지역이었기 때
문이다. 실제로 거란이 침략했을 때, 대부분의 전투가
~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만약 고려에 강동 6주의 방어선 13 14 차시
이 없었다면 개경이 몇 번 더 함락되고, 전쟁의 결과가
저고여 피살 사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
- 김인호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웅진지식하우스, 2011, 73쪽 - 가 귀국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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