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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건국 강령의 이념을 계승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법통 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호는 광복 후 새 나라를 세
을 주장하며 반탁 운동을 펼쳤다. 우기 위한 열망 속에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대한
맥아더의 지원을 받으며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 촉성 민국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식에서 채택
중앙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노선은 ‘대동단결론’과 ‘반공’ 되었던 것이다.
이었으며, 1946년 6월에 이미 단독 정부 수립 발언을 하 - [참조]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
는 등 반공 분단 정부 수립의 길을 걸어갔다.
좌익의 대표적인 정치 세력은 조선 공산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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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2 차시
1945년 9월에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 공산당은
1946년 초에는 미군정에 협조적이었고 당 조직과 대중 임시 수도 부산
조직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후 신전술을 6·25 전쟁 중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
채택하면서 미군정의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지 부산이 임시 수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시 수
중도 좌파에 속하는 정당으로는 조선 인민당과 조선 도는 본래의 수도가 전쟁 등에 의하여 점령되거나 위험
신민당이 있었다. 조선 인민당은 1945년 11월에 여운형 에 처하였을 때, 임시로 수도의 기능을 하는 도시이다.
을 중심으로 발족하였다. 이 정당의 국가 건설론은 조선 6·25 전쟁 발발 후 1950년 8월 18일에 정부 기관이 부
공산당과 많이 비슷하였지만, 민족 단결을 중시하고 폭 산으로 이전되었다.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경상남도청
력 혁명보다는 합법적인 민주주의 절차를 중시한 점에 을 임시 중앙청으로 정하였다. 부산시 청사에는 사회부
서 차이가 있었다. 조선 신민당은 화북 조선 독립 동맹 와 심계원·고시 위원회·문교부를 두고, 남전(南電) 경남
의 후신으로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경성 특별 위원 지부에 상공부를 두었다. 국회는 부산 극장에, 사법 기관
회를 따로 두었다. 백남운은 연합 민주 정권의 수립을 지 은 부산 지방 법원에, 검찰 기관은 부산 지방 검찰청에
향하는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 8월에 좌익은 두었다. 그 외에 중앙에 있던 경제·사회·문화·금융·교
3당 합당을 추진하였지만 박헌영 지지 세력과 여운형 지 육 관련 기관들도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미국 대사관은
지 세력으로 분열하고, 전자가 중심이 되어 11월에 남조 부산 미국 문화원에 자리 잡았고, 각국의 외교 기관들도
선 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부산에 자리하였다. 정부는 9·28 서울 수복 후 서울로 환
- 김성보, 「해방 후 정치·사회 갈등과 민족 분단」, 지식산업사,
도하였다가 1·4 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졌다.
2008, 385~386쪽 -
제헌 국회와 국호 결정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 국회에
서는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실무 위원으로 헌법 기초 위
원회를 조직하였다. 헌법 기초 위원회에서 거론된 국호
는 대한민국, 고려 공화국, 조선 공화국, 한국 등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이청천 등이 지지하였는데,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반면
▲ 부산 임시 수도 정부 청사
한국 민주당 계열에서는 고려 공화국을 선호하였다.
- [참조] 부산역사문화대전 향토대백과(busan.grandculture.net) -
1948년 6월 7일, 헌법 기초 위원회는 국호 문제를 놓
고 격론을 벌였다. 각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표결에 들
어갔다. 결과는 대한민국 17표, 고려 공화국 7표, 조선 흥남 철수 작전
공화국 2표, 한국 1표였다. 30명의 위원 중에 과반수가 흥남 철수 작전은 중국군의 6·25 전쟁 개입으로 국군
넘는 17명의 찬성을 얻은 대한민국이 국호로 결정되었 과 국제연합군이 수세로 전환된 상황하에서 장병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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