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0 - ele_society_5-2_tutor
P. 280

귀국 후 임시 정부는 임정 법통성과 반탁 민족 자결권                     모스크바 3국 외무 장관 회의
           의 확립을 통한 과도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임
           정의 정부 수립은 미군정 체제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임
           시 정부는 환국 직후 정치 공작대와 행정 연구 위원회를

           조직하여 내무부 산하에 두고 반탁 시위 운동을 준비하
           는 한편, 12월 31일, 포고문 「국자1호」 와 「국자2호」 를
           발표하여 사실상 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미군정의 정권을 빼앗으려는 ‘임
           시 정부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신익희를 체포하였다. 이
           를 계기로 임시 정부는 미군정의 감시와 견제를 받게 되                    ▲ 모스크바 3국 외무 장관 회의의 모습
           는 한편, 정부로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 장관들은
                           -  이승억, 「해방 직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소련의 모스크바에 모여 한민족의 향방에 대한 중대한
                    대중·대미 관계, 임시 정부의 귀국과 대 미군정 관계」,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
                               한국역사연구회, 1997, 87~120쪽 -
                                                             의 관리 문제, 한국의 독립 문제 등을 논의하였는데, 한
                ~                                            반도에 새로운 국가를 수립할 원칙과 절차를 둘러싸고
            19 20 차시
                                                             미국과 소련은 상반된 의도를 드러냈다. 당시 미국의 기
              38도선의 설치                                       본 입장은 한국을 곧바로 독립시키는 데에 소극적이었

             38도선의 설치는 표면적으로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다. 모스크바 3국 외무 장관 회의에서 미국은 한반도에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 해제 이후 38도선                   장기간에 걸쳐 4개국에 의한 신탁 통치를 실시해야 한다
           은 미국과 소련 양 주둔군의 경계선이 되었다. 미소 양                    는 입장을 취하였다. 반면 소련의 입장은 한반도 문제를
           측은 1946년과 1947년에 각각 1차례씩 38도선의 정확                 당사자 간의 처리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한 위치 판정을 위해 조사 활동을 벌였다. 미소 양측이                     결국 모스크바 3국 외무 장관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은
           사소한 38도선 충돌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엄격한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설립한다.’, ‘임시 정부가
           조사를 수행함에 따라 한국인들도 점차 38도선이 미소                     독립을 준비할 때까지 5년간 미·영·중·소의 4개국 신탁
           간의 경계선일 뿐만 아니라 남북한 간의 경계선이자 국                     통치를 실시한다.’, ‘그의 절차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소

           경선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38도선은 미소 양군                     공동 위원회를 개최한다.’ 등이었다. 그리하여 1946년 5
           의 군사 관할 구역의 외연을 표시하는 선에서 더 나아가                    월과 1947년 3월에 미소 공동 위원회를 열었으나 무위로
           한국인들에게 국경선으로 강요되었던 것이다.                           끝나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고 말았다.
             미소 점령기 동안 38도선에서 미소 간에 수많은 군사                         - 류승렬,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7 - 현대』,
           적 분쟁이 있었으나 심각한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 그러                                               가람기획, 2016, 379쪽 -
           나 1948년에 이르러 38도선 충돌은 남북 간의 충돌로 성
           격이 전환되었다. 미소 양군이 철수한 1948년 1월 15일
                                                               신탁 통치
           이후 남북 간의 38도선 충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38도
           선 충돌의 원인은 미소 양군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이들                      광복 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군사 점령하였으나
           은 철군하면서 군대와 무기·군수품은 물론 38도선 이                     우리 민족은 그들을 해방군으로 인식하고 38도선의 남과
           남·이북의 한국인들에게 군사적 분쟁과 호전성, 상대방                     북에 미군과 소련군의 주둔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
           에 대한 증오를 남겨 놓았다.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 정병준, 「1945~48년 미소의 38선 정책과 남북 갈등의 기원」,         광복 후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근접한 소련의 점령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2004, 179~202쪽 -        을 우려한 미국이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하였고, 자치


           278    각론
   275   276   277   278   279   280   281   282   283   284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