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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을 확인할 때까지 신탁 통치안을 제안하였다. 자치                      광복 직후 제주에서는 6만여 명 귀환 인구의 실직난,
                 능력이란 한반도가 미국의 영향권이 아닌 소련이나 중                     생필품 부족, 콜레라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
                 국의 세력권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할 능력을 말한다. 그                   재와 미곡 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
                                                                                                                   2
                 것은 일본 패전과 더불어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염려한                    신 등이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우려였다.        - [참조] 우리역사넷(contents.history.go.kr) -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             단원
                                                                  대회에 참가하였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에
                    신탁 통치 반대 운동                                   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

                   모스크바 3국 외무 장관 회의의 한국 문제 결정과 관련                 이 발생하였다. 3·1절 발포 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
                 해 『동아일보』가 한국 최초로 보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욱 악화시켰다. 이에 제주도의 남로당은 조직적인 반경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                  찰 활동을 전개하였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 통치를 주장하                   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한 남
                 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 투표는 불가                  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하였지만, 사후 처리는 경찰
                 능하다고 본다.”                                        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

                   즉 소련의 주장으로 신탁 통치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을 추진하였다.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은 오보에 가까운 것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이었음에도 국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켜 광범위한                     교체하였고, 경찰과 서북 청년 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
                 반대 운동을 촉발하였다. 오랜 식민 지배에서 막 벗어난                   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  작전을  벌였다.  이후
                 상황에서 또다시 신탁 통치를 받는다는 보도 내용은 대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
                 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이 발생하여 제주 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 상
                   신탁 통치안이 보도된 1945년 12월 28일, 김구와 임시              황으로 변해 갔다.

                 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렸고, 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
                 튿날에는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가 결성되                    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
                 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반탁 운동이 전개되었다. 반탁 운                  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하였다.
                 동은 1945년 말과 1946년 1월 초에 걸쳐 진행된 이후                     -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
                 1947년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재개가 가시화되면서 다
                 시 한번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
                 되며 신탁 통치 문제 자체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소                        해방 후의 정치 세력
                 멸되었다. 그러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계기로 좌익 세                    좌우익의 대립 구도는 광복 직후 정치 활동의 조직화
                 력과 우익 세력 간의 대결 구도가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와 더불어 형성되었다.

                      -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     한국 민주당은 김성수·송진우 등이 참여한 1945년 9
                                                                  월에 창당된 해방 뒤 최초의 우익 정당이다. 한국 민주
                    제주 4·3 사건
                                                                  당은 초기에는 원세훈·김병로 등 항일 운동가들도 동참
                                                                  하는 등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정치인들이 집결
                                                                  한 정당이었다. 한국 민주당은 인민 공화국에 반대하고
                                                                  미군정에 협조하였으며, 임시 정부를 지지하였다가 이
                                                                  승만 지지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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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산간 지대로 대피한 주민들                                을 결성하였다. 이 정당은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대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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