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5 - ele_society_6-1_tutor
P. 155
생들과 시민들이 4·19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독재 민 오후 4시 특전사 공수 부대원들이 광주에 투입되어 시위 1
주 항쟁을 일으켰다. 먼저 부산에서는 10월 16일 오전 를 진압하였으며, 이는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었다. 최정
단원
10시에 시작된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교내 시위가 순식 예 부대인 공수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무차별 폭행하며 진
간에 4,000여 명으로 불어나면서 거리로 진출하기 시작 압한 것이다.
하였다. 이후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이 선 이후 광주 시민의 저항으로 대부분의 공수 부대원이
포되고, 전방 공수 부대 2개 여단 5,000여 명이 부산에 외곽으로 밀려난 21일, 도청에 고립된 일부 공수 부대원
투입되었다. 그러자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 갔다. 10월 들이 시민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해 금남로는 피로 물들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었다. 이에 시민들은 각지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하였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 앞에서 고, 오후 5시경 공수 부대원들이 광주에서 철수하면서
1,000여 명이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하였다.
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 시민군은 자치적으로 치안을 유지하며 사태 수습을
가 전개되었다. 위해 노력하였다. 공동체를 형성하여 부족한 물자의 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 『한국 민주화 운동사 연표』, 점매석을 방지하였고 은행 등 금융 기관의 약탈 또한 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367쪽 -
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22일, 23일 수습 위원회를 통해
무기를 반납하며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던
5·18 민주화 운동 이전의 상황 시민들의 노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계엄군이 25일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민주화 광주를 완전히 봉쇄한 뒤 27일 도청을 장악하고 시민군
를 향한 여러 조치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12월 12일 전 을 진압함으로써 사태는 종결되었다.
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사 반란을 일으 - 모지현, 『한국 현대사 100년 100개의 기억』, 더좋은책, 2019,
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당시 정승환 계엄 사령관을 불법 356~358쪽 -
적으로 체포하였으며 최규하 대통령을 비롯하여 내각을
무력화하는 등 단계적으로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광주 시민군의 궐기문
이에 반해 민간에서는 민주화를 향한 열기가 끓어올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랐고, 5월에는 수만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까지 행진하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
며 민주화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 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대로 흘러갔다. 신군부는 군대를 전국에 파견하였으며 일어선 것입니다.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 부대
5월 17일에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김영삼, 김 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
대중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이 체포되었고, 재야인사 차별 살상을 감행하였으니! 너무나 경악스러운 또 하나
와 운동권 대학생들 또한 강제로 연행되거나 군대에 끌 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 당국은 발포 명령을 내려
려가는 등 1980년의 봄은 1972년 유신 체제 못지않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
상황으로 치달았다. 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 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
- 심용환, 『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한국사 365』,
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
비에이블, 2020, 184쪽 -
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
5·18 민주화 운동의 전개
고 우리 부모 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 200여 명과 학 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교를 점령한 군인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그때만 해 몰고 있습니다.
도 광주 시민들의 본격적인 참여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 - 신동아편집실, 『선언으로 본 80년대 민족·민주 운동』,
력만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아일보사, 1990, 28~29쪽 -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