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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까닭                                21   차시                                        1


                                 최만리의 상소문                            조선의 신분제                                       단원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자가 같았어도 소송을 치르                     『경국대전』에는 모든 사람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
                   던 중에 억울한 누명을 쓰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는 양천제가 규정되어 있었다. 양인은 국가에 대해 조세
                   우리나라에서도 옥에 갇힌 사람 중 이두를 해석하여 직
                                                                  와 국역을 부담할 의무를 지니면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
                   접 초사를 읽고 무고인 줄을 알더라도 매질을 견디지
                                                                  는 권리를 가졌다. 반면 천민은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
                   못하여 굴복하는 자가 많은데,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
                                                                  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지 못해서 누명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양반이란 문반과 무반의 관직을 지닌 사람을 의미하
                    만일 이렇다면 언문을 쓴다고 하여 무엇이 다르겠습
                   니까. 형벌과 옥사의 공평함과 공평하지 못함은 관리에                  던 것이었으나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졌으며, 양반 관료
                   게 있는 것이지, 말과 글자의 같음과 같지 않음에 있지                 들을 보좌하던 중인도 별도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하여
                   않습니다. 언문으로 옥사의 초사를 공평하게 하고자 한                  조선 사회는 점차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구분되는
                   다는 것에 대해 신 등은 아직 그 옳음을 보지 못하였습                 4신분제로 굳어졌다.
                   니다.                            - 『세종실록』 -                  -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2016, 108쪽 -
                   1444년에 최만리를 중심으로 몇몇 신하가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전반적인 내용                       양반의 지위
                 은 언문(한글) 대신 기존의 이두를 그대로 사용하자는
                                                                    양반은 본래 특정한 개인이나 가문을 가리키는 용어
                 것이었다. 이들은 한자로 구축된 기존 지식 체계를 유지
                                                                  가 아니었다. 조정에서 의식 등을 치를 때 그곳에 참석
                 하고자 하였다. 한글의 영역은 이두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는 문반과 무반 등 현직 관료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
                 는 것이었다.
                                                                  러다가 점차 넓은 의미의 사회 계층과 신분에 대한 명칭
                   반면 세종은 철저히 아랫사람을 위한 소통과 배려에
                                                                  으로 변화하였고, 현직 관료뿐만 아니라 관직을 가질 수
                 집중하였다. 문자 생활을 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인물과 가문을 포괄하는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라면 기존 지식 체계가 정체될 수 있을지라도 꼭 한글이
                                                                    양반은 조선 시대에 가장 높은 신분이었지만, 법적으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세종은 이를 ‘편민(便
                                                                  로는 양인의 하나로 관직이 없는 양반은 당연히 군역을
                 民: 백성을 편안하게 함.)’이나 ‘위민(爲民: 백성을 위
                                                                  져야 했다. 하지만 15세기 말경에는 관직을 갖지 않아도
                 함.)’으로 표현하였다.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세종은 조
                                                                  관품만 있으면 그 자식까지도 군역을 면제하는 것이 일
                 목조목 반박을 하였는데, 아래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반화되었다. 중인이나 상민과 달리 관품을 손쉽게 얻을
                 두에 대한 내용에 있어서도 세종은 편민의 입장을 보
                                                                  수 있는 양반 자제는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군역
                 였다.
                                                                  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특권을 갖게 된 양반은 농사와 같
                    임금께서 상소를 보시고 만리 등에게 이르시기를,                    은 생업에는 전혀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학업과 가문을
                   “…… 또 이두를 제작한 까닭은 아무래도 백성을 편하                  배경으로 오직 관직에 나아가는 것만 목표로 삼았다.
                   게 하려고 한 것이지 않은가. 만약 백성을 편하게 하려                   양반다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잡일을
                   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한                   담당하는 노비가 필요하였다. 15~16세기 경상도 전통
                   것이 아니겠는가.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여기면서 군상                  양반가의 경우 중앙 관료나 그 자손은 200구 이상, 지방
                   의 일은 그르다고 하는데 어찌하여서인가.”                        양반의 경우 60~80구 내외의 많은 노비를 보유하였다.
                                                    - 『세종실록』 -
                                                                  노비는 양반의 재산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가축을 세
                                                                  듯 ‘구’로 표현하였다. 양반은 자신의 수족 역할을 하는
                          - 박준호, 「조선 후기 평민 여성의 한글 소지 글쓰기」,
                                    한국국학진흥원, 2018, 435~437쪽 -     노비의 수를 늘리기 위해 자기가 소유한 여종을 양인 남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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