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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 혼인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는                     이를 크게 꾸짖고 남은 의병을 이끌고 적의 한가운데로
           주인의 노비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송빈과 함께 죽
                           - 권내현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3』,       은 의병이 수백 명이었다.
                               웅진지식하우스, 2016, 89~90쪽 -        4월 17~20일까지 4일 동안 벌어진 김해성 전투는 의

                                                             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일본군과 싸운 임진왜란 최초
                ~
            22 23 차시                                         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관군이 맞서 싸운 부
              행주산성                                           산진과 동래성이 하루 만에 무너진 것과 달리, 일본군의
                                                             한 부대였다고 하더라도 관군도 없이 의병들이 일본군과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에
                                                             대결하여 4일간 항전하였다는 사실은 대단한 것이었다.
           있는 토성이다. 덕양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
                                                             임진왜란 이후 송빈과 김득기, 이대형, 류식에게 추증이
           과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졌다.
           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
           쪽으로 넓은 평야를 감싸고 있는 형태는 삼국 시대 초기
           에 세워진 산성 형식과 같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

           북쪽 성벽만 남아 있으며, 북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
           나 외성 성벽은 확인할 수 없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
           상부를 깎아 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
           루(흙으로 만든 보루)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
           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 사충단(경상남도 김해시)  송담서원 안에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
             행주산성은 1593년(선조 26년)에 권율 장군이 대승을
                                                             등 사충신이 추증받은 직함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거둔 전적지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 대첩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encykorea.aks.ac.kr) -
           이룬 곳이다. 현재 성안에는 복원된 415m의 토성의 성
           곽과 1603년에 세워진 행주 대첩비가 있다. 또한 1970
                                                               총통과 조총
           년에 세워진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 등이 있다.
                                                              고려 말 최무선이 화약 제조에 성공한 후 화약은 전
                                - 고양시청(www.goyang.go.kr) -
                                                             쟁 무기에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조선 태종과 세종 대
              의병장 송빈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화약 무기를 개량하였고, 화차
             1592년 4월 14~15일에 부산진과 동래성을 무너뜨린                 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 발달의 결과로 총통이 만들
           일본군이 김해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송빈은 김                      어졌다.

           득기, 이대형, 류식 등과 함께 수백 명을 모아 김해성으                    총통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을 이용하여 화살을 발사
           로 들어갔다.                                           하는 화약 무기였다. 크게 나무 손잡이와 쇠통으로 구성
             4월 17일에 일본군의 한 부대가 김해성을 에워싸고 공                  되어 있는데, 쇠로 만든 통에 화약을 넣고 화살을 꽂은
           격하였다. 김해성의 관군과 의병은 이를 막아 내고 김해                    뒤 심지에 불을 붙이면 화약이 폭발하여 화살이 발사되
           와 부산 사이에 있는 죽도까지 일본군을 추격하였다. 다                    었다. 총통의 크기는 아주 작은 화살 한 개를 쏘는 것에
           음 날 전날의 참패를 복수하기 위해 일본군이 대규모로                     서부터 2m가 넘는 큰 화살을 쏘는 것까지 다양하였다.
           몰려오자 관군의 지휘관이 달아나 버렸다. 송빈은 영남                     작은 화살은 사람이나 말을 맞히는 데 사용되었고, 큰 화

           의 곡창이며 요충 지대인 김해를 지키기 위해 의병들을                     살은 성을 깨뜨리거나 전선을 부수는 데 사용되었다.
           독려하여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이튿날 성이 일본군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군은 여러 가지 총통류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이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송빈은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조총을 들고 쳐들어온 일본


           202    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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