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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초반 전투에서 열세를 보였다. 총통은 정확한 조준                   혜의 지리적 요건 때문에 삼국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                    1
                 사격이 매우 어렵고 명중률도 낮은 반면, 조총은 사격할                   까지 남한산성은 도읍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단원
                 때 조작이 간편하고 조준이 가능하여 명중률도 높았기                                      -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2011, 2쪽 -
                 때문이다. 조총이라는 이름도 ‘하늘을 나는 새를 쏘아 맞

                 혀서 떨어뜨릴 수 있다.’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척화파와 주화파
                   그러나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큰 승리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서
                 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는 바로 대형 총통                   로 대립하였다. 척화론은 청과의 항전을 주장하는 것으
                 을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의 조                    로,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한 삼학사(오달제, 홍익한, 윤
                 선 함대는 일본군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                    집)를 비롯하여 김상헌과 정온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익진을 펼쳐 포위한 후 대형 판옥선에 실은 대형 총통으                   들은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
                 로 일본군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나아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 권내현 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3』,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이 논의
                                    웅진지식하우스, 2016, 154~155쪽 -
                                                                  는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 때에 가장 왕성하여 북
                                                                  벌론으로 이어졌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인조반정
                                                                    반면 주화론은 청의 힘을 고려할 때 청과 강화하는 것
                   광해군은 중국의 변화에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중립적                    이 현실적인 해결책임을 주장한 것으로, 최명길이 대표적
                 인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후금이 명을 압박하자 명은 조                  인 인물이다. 이경석 역시 병자호란 직후 청과의 불편한
                 선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여러 구실을 대며                    관계를 조정하고 조선의 안전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출병을 피하였으며, 출병하더라도 압록강 주변에서 과                                     -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2011, 58쪽 -
                 시만 할 뿐 힘을 행사하진 않았다.
                   1619년에 1만여 명의 군사를 지원병으로 보냈는데,                     삼전도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명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                       삼전도는 ‘마전도’라고도 불렸으며 나루터 주변에 삼
                 로 따르지 말고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라고 하였다.                   의 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1439년에 설
                 출병하되 형세를 관망하여 향배를 정하도록 밀령을 내                     치된 삼전도 나루터는 한양과 경기도의 여주·이천 일대
                 려, 명의 요청을 들어주면서도 후금과의 불필요한 충돌                    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한강은 물자가 한양으로
                 을 피하게 한 것이다.                                     진입하는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삼전도에도 많은 사
                              - 우리역사넷(www.contents.history.go.kr) -  람과 물자가 모여들었다.
                                                                    삼전도는 한양의 궁궐에서 출발하여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                                          남한산성에 도착하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였다. 병자

                   우리 역사에서 남한산성이 지닌 가장 중요한 의미는                    호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 정부는 장기적인 항전에 대비
                 나라의 중심을 보호하는 산성이라는 것이다. 한강 남쪽                    하고자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지만, 가는 길이 끊겨 급
                 에 위치하면서 삼남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
                 이곳은 외부 세력으로부터 도읍을 보호하기에 적합한                      에 고립되었던 인조와 대신들은 45일 만에 청에 항복하
                 지역이었다.                                           였다.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 지형을 따                 에게 항복의 예식을 행하며 패배를 인정하였다. 청은 청
                 라 성벽을 쌓아 올려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를 삼전도에 세우도록 강

                 었다. 내부는 넓고 평탄하였으며 우물이 80여 곳, 연못                  요하였고, 이후 삼전도는 조선에 온 청의 사신들이 꼭 시
                 이 45곳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여 군량미만 충분                   간을 내어 들르는 장소가 되었다.
                 하다면 수만 명의 병력도 수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천                                 - 우리역사넷(www.contents.history.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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